집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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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2,736회 작성일 17-11-27 10:53본문
집
이선영
남은 집 몇 채이려나, 나 여러 채의 집들을 거쳐 왔네
크거니 작거니 높거니 낮거니 했지만
들어앉으면 달리 나설 데도 없는 나의 집이었다네
옥상에서 별을 올려다보던 집
계몽사 50권 세계동화전집이 반겨주던 집
할아버지가 벼루에 먹을 갈아 다리 가는 학을 그리던 방이 있던 집
할머니가 큰솥에 개떡을 찌던 부엌이 있던 집
키우던 고양이가 갓 낳은 새끼들을 숨기려다 목줄에 걸려 죽고
나는 멍하니 창틀에 올라앉아 마당의 후박나무만 바라보던 집
저녁 어스름 귀갓길에 문득 노을빛 조등이 걸렸던 집
아버지에게 대들다 한동안 치마 아래로 종아리가 시퍼렇던 여대생이 살던 집
후두둑 빨간 딱지가 붙고 빚쟁이로 몇날 며칠 눅눅하던 집
퇴직하고 이빨 빠진 아버지가 낡은 소파와 함께 음침한 정물화가 되어가던 집
그 집이 싫어서 한 남자와 도망쳐 나온 집
커다란 모기장을 사면 벽에 걸고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던 집
아이들이 자라면서 식탁이 소란스러워지고
기어코 같이 놓일 수 없게 된 수저들이 생긴 집
네 식구가 제 귀퉁이에서 각자 자기 식의 평화를 지키는 집
때로 네 식구 마음 따라 문짝은 어그러지고 변기가 막히고 천장이 얼룩지는 집
제 손바닥에 옹송그리는 식구들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지상의 단 한칸
어쩌다 예전 살던 곳들을 지나칠 때면
어떤 집은 뭐하러 또 왔냐 묻고 어떤 집은 들렀다 가라 하는데
제 들보를 갉아먹는 슬픈 벌레를 키우지 않는 집은 어디 있으려나
—《창작과비평》2017년 가을호
1964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평범에 바치다』 『일찍 늙으매 꽃꿈』『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하우부리 쇠똥구리』
‘21세기 전망’ 동인
댓글목록
童心初박찬일님의 댓글
童心初박찬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집이 인생이었네.
즐감하였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