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도와 영하 1도 사이 / 조현석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93회 작성일 18-02-05 15:46본문
0도와 영하 1도 사이
조현석
빈 가지 가득 단 은행나무는 손톱 같은 연록색 잎을 피운다 바람에 휘감긴 잎들은 한껏
응석 부리는 몸짓으로 흔들거리며 자란다 은행나무가 다른 은행나무에게 다가갈 수 없기에
바람에 부탁한다
심술궂은 한여름 햇살의 고통을 식혀주는 바람에게 은행나무는 또 다른 은행나무를 위해
명령한다 다가오는 가을을 맞으며 푸른 잎 노랗게 물들이며 깊고 달콤한 꿈 꾸겠구나 이젠
불임의 밤은 없겠구나 가지마다 주렁주렁 황금방울 맺으라고 쉼 없이 바람을 보낸다 여름 내
시달린 은행나무가 늦가을쯤 어설피 잠들다 깨어나다 할 때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질린
꿈의 알맹이를 모두 떨구게 한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춥다고 느끼는 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샛노란 잎들은 한순간 나뭇가지를 버린다 황금방울 떨어져 고약하게 썩는 뿌리로 해묵은
열정이 스며든다
- 월간 《시인동네》 2018.2월호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 …체류자』 『울다, 염소』 등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