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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소극 / 윤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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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60회 작성일 18-03-14 15:49

본문

저녁 7, 笑劇

 

  윤예영

 

 

1.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구두를 벗는다

 

  눅신한 피곤을 벗어 버린다

 

  셔츠를 벗는다

 

  미열이 번진다

 

  빌딩옥상에서 내려다보던 풍경이 흩날린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리어카를 끄는 노인, 길에서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 그리고 나무

 

  나무, 나무, 버즘처럼 껍질이 벗겨지는 나무

 

  허리띠를 푼다

 

  바지가 흘러내린다

 

  비늘 같은 오후가 둥치를 타고 흘러내린다

 

  남자,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 마른 짐승 한 마리가 제 샅을 핥고 있다

 

  남자, 거울에 한 쪽 발을 담근다

 

  불쌍한 짐승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2.

 

  여자가 남자의 구두에 발을 넣어 본다

 

  하루 종일 무엇을 밟고 다녀 이리 말랑해졌는가

 

  그리고 남자의 흔적을 줍는다

 

  남자의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고,

 

  넥타이와 허리띠를 맨다

 

  여자, 거울 위에 손을 얹는다

 

  잔물결이 인다

 

 

   나무가 가지를 흔든다 푸른 그늘이 춤을 춘다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춤춘다 혈관 속에서 풋내나는 수액이비명을 지른다 사람들 속을 걷는다 땀냄새, 오줌냄새, 바람냄새를 헤친다 걷는다 뛴다 뛴다 먼지를 쓰고,햇살을 젖히고, 질긴 불안으로 목을 조르고,조르고, 조르고, 달콤씁쓸,달콤씁쓸, 달콤씁쓸한 



   여자, 검지로 겨울을 겨눈다

 

 

 

 

3.

 

  여자, 첨탑 위에 걸린 태양을 그린다

 

  사랑해서

 

  남자, 나리꽃 한 다발을 그린다

 

  사랑해서

 

  여자, 깨진 질그릇을 그린다

 

  사랑해서

 

  남자, 나리꽃 한 바구니를 그린다

 

  사랑해서

 

  여자, 쓰러지는 숲을 그린다

 

  부질없어

 

  남자, 쓰러지는 숲 위로 날아오르는 새떼를 그린다

 

  사랑해서

 

  여자, 남자를 그린다

 

  절망해서

 

  남자, 여자를 그린다

 

  부끄러워

 

  여자가 거울을 닦는다

 

  거울아 거울아 꽃아 돌멩이야 염통아

 

  남자가 거울을 닦는다

 

  여자야 여자야 여자야

 

 

 

4.

 

  방아쇠를 당긴다

 

  포말이 인다

 

  남자가 흩어진다

 

  여자가 합장을 한다

 

  남자가 흩어진다

 

  여자가 합장을 한다

 

  남자가 흩어진다

 

  여자가 숙이고 또 숙인다

 

  잘게 부서지는 은칠 위로 사람을 닮은 허물이 떠오른다

 

 

- 계간 세계의 문학2018년 겨울호

 

 

yy.jpg

1977년 서울 출생

1998현대문학등단

시집으로 해바라기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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