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생활 5/ 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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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22회 작성일 18-10-26 09:28본문
식물의 사생활 5
이성렬
그 꽃이 어찌하여 땅 속에 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지상에서 살 수 없어 흙에 묻힌
삶이, 대지의 어스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으리라 추정되었다
보름달이 뜰 무렵 기진한 봉오리를 여는 꽃은 씨앗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 또한 미루어 짐작할 뿐
그 어느 풀벌레나 벌 나비도 사귀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기다렸다, 꽃술에 와 닿는 진동을 가는
잎맥으로 감지하여 지상의 소식을 듣곤 하였다
오랜 후 눈 멀고 귀 먹은 아이가 들판을 헤맨 끝에 찾아온 겨울 저녁, 얼음조각들은 아이의 발자국을
찾아와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발걸음을 알아챈 꽃이 결사적으로 흙벽을 할퀴며 하룻밤 동안 지샌 뒤,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꽃은 한 점 온기가 되어 죽고, 아이는 그 곁에 창백한 꽃으로 피어나, 다시 지하에서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 땅 속에서 피는 꽃이 제주에서 발견됨
-이성렬 시집『밀회』(황금알, 2013)에서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밀회』 등
산문집 『겹눈』
제1회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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