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통증 /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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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통증
양현근
1
길 건너편 똥개가 컹, 어둠을 한입 물면
온 마을의 개들이 일시에 일어나
컹컹, 적막강산 긴긴 밤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마을 불빛이
숲을 질러 처마 밑까지 왔다
장독대, 폭설, 고요
등허리가 시린 문풍지는
도란도란 솔바람소리를 베고 잠이 들고
길 잃은 눈발이 개집까지 마구 들이치는 밤
마루 밑 댓돌에는 밭은기침소리 고이고
눈이 침침한 금성라디오가 혼자 칭얼거렸다
2
소년은 꽁꽁 언 잠지를 딸랑거리며
얼어붙은 논두렁 사이를 펄럭거렸다
먼 저녁이 매달리던 참나무에게 돌팔매질을 날려대면
폭설은 마을의 길이란 길 다 지우고
아랫녘으로 가는 도랑의 물소리만 풀어놓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오늘의 날씨 큰 눈 왔음, 길이 지워졌음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다
소여물이 끓던 사랑방 아랫목
할아버지의 걸걸한 기침도 화덕처럼 끓고
외롭고 심심한 손가락이
장지문 여기저기 숨구멍 뚫어가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3
낡은 기와지붕이 고드름을 하나, 둘 매다는 동안
소년도 대나무처럼 몸의 마디를 키웠다
겨우내 눈발을 뒤집어쓴 대숲은
어디론가 보내는 울음 소인을 쿵쿵 눌러대곤 했다
아직 산골의 춘삼월은 멀고
산 그림자는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밤새 호롱불 깜박거렸다
돌팔매질로 멍든 참나무 껍질이 아무는 동안
눈은 몇 번이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겨울이 말없이 오가고
기침소리도 녹았다 풀렸다
4
궁금한 강바람이
구멍 숭숭한 돌담에 휘파람소리를 내려놓고
봄기운이 얼음 계곡에 숨구멍을 냈지만
어느 해부터 할아버지 밤 기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통증은 소년의 옆구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꿈을 꾸면 왼쪽 갈비뼈가 따라 올라오고
오래 숨겨둔 기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울음의 마디를 쏟아내곤 했다
아프고 시린 말들이 번식하는 계절이었다
5
며칠 전부터 왼쪽 허리가 시큰거리더니
왼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푸른 말발굽으로 내달리던 시절
드넓은 풀밭을 겁 없이 질주하다 자주 넘어진 탓일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엎지른 탓일까
등베개를 집어넣으니 비로소 균형이 잡힌다
세상과의 간격에는 적어도
등베개 하나 이상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안다
밤이 되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마른기침, 눌러 참을 수 없는
왼쪽 허리쯤에 도착한 그 저녁의 폭설이여
차마 그리운 통증이여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문학의전당, 2013)에서
1998년 『창조문학』 등단
시집 『수채화로 사는 날』 『안부가 그리운 날』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 『기다림 근처』 등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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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폭설이 잦았던 어릴적 고향에 대한 향수
산을 끼고 있는 어느 산촌이 시인의 고향.
시어 하나하나에 그리움이라는 향수가 묻어 난다.
산촌이라 주파수가 잘 전달되지 않는 라디오에서는 지익 지익거리는 잡음이 나오는데,
그 라디오가 금성라디오란다.
왕관에 별을 단 상표들 달고 있는.
내 살던 동네에서는, 지게 한 가득 산더미 같은 라디오를 지고, 한 손에는 벽돌같은 밧데리를 고무줄로 동여 매단 금성라디오를 팔러 다니던 아저씨가 곧잘 지나 다녔다.
반갑다, 여기서 그 라디오를 듣다니.
이 동네는 겨울이면 큰 눈이 내렸을 것이다.
겨우내내 눈이 내리기도 했었을 듯.
한참 천방지방 뛰어다니며 놀 나이에 방 안에 갇혀 지내려니 어린 소년은 얼마나 지겨웠을까.
그 방안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며, 문풍지 침 발라 뚫어가며 내다본 동네의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밤이 되어 반복되는 마른 기침이 왼쪽 가슴에 통증을 가져다 준다, 어린 시절 뛰 놀던 깊은 눈이 퍼붓던 고향이여!
1에서 4까지는 옛 추억, 5는 오늘 밤이다.
큰 눈이 왔음, 길이 지워졌음이라 일기를 썻던 시인은 어려서부터 깊은 감수성이 있었다.
양 시인의 시는 몇 편밖에는 읽지 못했는데, '간격'이라는 시어가 자주 보인다.
이 간격이 시인에게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일까 궁금해 진다.
201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