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통증 /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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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676회 작성일 18-12-31 10:18본문
그리운 통증
양현근
1
길 건너편 똥개가 컹, 어둠을 한입 물면
온 마을의 개들이 일시에 일어나
컹컹, 적막강산 긴긴 밤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마을 불빛이
숲을 질러 처마 밑까지 왔다
장독대, 폭설, 고요
등허리가 시린 문풍지는
도란도란 솔바람소리를 베고 잠이 들고
길 잃은 눈발이 개집까지 마구 들이치는 밤
마루 밑 댓돌에는 밭은기침소리 고이고
눈이 침침한 금성라디오가 혼자 칭얼거렸다
2
소년은 꽁꽁 언 잠지를 딸랑거리며
얼어붙은 논두렁 사이를 펄럭거렸다
먼 저녁이 매달리던 참나무에게 돌팔매질을 날려대면
폭설은 마을의 길이란 길 다 지우고
아랫녘으로 가는 도랑의 물소리만 풀어놓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오늘의 날씨 큰 눈 왔음, 길이 지워졌음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다
소여물이 끓던 사랑방 아랫목
할아버지의 걸걸한 기침도 화덕처럼 끓고
외롭고 심심한 손가락이
장지문 여기저기 숨구멍 뚫어가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3
낡은 기와지붕이 고드름을 하나, 둘 매다는 동안
소년도 대나무처럼 몸의 마디를 키웠다
겨우내 눈발을 뒤집어쓴 대숲은
어디론가 보내는 울음 소인을 쿵쿵 눌러대곤 했다
아직 산골의 춘삼월은 멀고
산 그림자는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밤새 호롱불 깜박거렸다
돌팔매질로 멍든 참나무 껍질이 아무는 동안
눈은 몇 번이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겨울이 말없이 오가고
기침소리도 녹았다 풀렸다
4
궁금한 강바람이
구멍 숭숭한 돌담에 휘파람소리를 내려놓고
봄기운이 얼음 계곡에 숨구멍을 냈지만
어느 해부터 할아버지 밤 기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통증은 소년의 옆구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꿈을 꾸면 왼쪽 갈비뼈가 따라 올라오고
오래 숨겨둔 기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울음의 마디를 쏟아내곤 했다
아프고 시린 말들이 번식하는 계절이었다
5
며칠 전부터 왼쪽 허리가 시큰거리더니
왼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푸른 말발굽으로 내달리던 시절
드넓은 풀밭을 겁 없이 질주하다 자주 넘어진 탓일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엎지른 탓일까
등베개를 집어넣으니 비로소 균형이 잡힌다
세상과의 간격에는 적어도
등베개 하나 이상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안다
밤이 되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마른기침, 눌러 참을 수 없는
왼쪽 허리쯤에 도착한 그 저녁의 폭설이여
차마 그리운 통증이여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문학의전당, 2013)에서
1998년 『창조문학』 등단
시집 『수채화로 사는 날』 『안부가 그리운 날』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 『기다림 근처』 등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댓글목록
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맛이깊으면멋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폭설이 잦았던 어릴적 고향에 대한 향수
산을 끼고 있는 어느 산촌이 시인의 고향.
시어 하나하나에 그리움이라는 향수가 묻어 난다.
산촌이라 주파수가 잘 전달되지 않는 라디오에서는 지익 지익거리는 잡음이 나오는데,
그 라디오가 금성라디오란다.
왕관에 별을 단 상표들 달고 있는.
내 살던 동네에서는, 지게 한 가득 산더미 같은 라디오를 지고, 한 손에는 벽돌같은 밧데리를 고무줄로 동여 매단 금성라디오를 팔러 다니던 아저씨가 곧잘 지나 다녔다.
반갑다, 여기서 그 라디오를 듣다니.
이 동네는 겨울이면 큰 눈이 내렸을 것이다.
겨우내내 눈이 내리기도 했었을 듯.
한참 천방지방 뛰어다니며 놀 나이에 방 안에 갇혀 지내려니 어린 소년은 얼마나 지겨웠을까.
그 방안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며, 문풍지 침 발라 뚫어가며 내다본 동네의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밤이 되어 반복되는 마른 기침이 왼쪽 가슴에 통증을 가져다 준다, 어린 시절 뛰 놀던 깊은 눈이 퍼붓던 고향이여!
1에서 4까지는 옛 추억, 5는 오늘 밤이다.
큰 눈이 왔음, 길이 지워졌음이라 일기를 썻던 시인은 어려서부터 깊은 감수성이 있었다.
양 시인의 시는 몇 편밖에는 읽지 못했는데, '간격'이라는 시어가 자주 보인다.
이 간격이 시인에게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일까 궁금해 진다.
201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