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에도 껍질이 있다 / 이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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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에도 껍질이 있다
이향지
휘저어놓은 창자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방귀는 꼭꼭 숨었다
뿡뿡거리며 재빨리 나섰다가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맹장처럼 싹둑 잘릴지 몰라
창자벽에 들러붙어 숨을 참는 것이다
방귀 터지기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
두레상 둘레에서 까먹고 버린 껍질 생각을 한다
안방 마루에 독상을 받고 이틀 동안
아버지는 백수였다 보리밥 싫어 반찬 싫어
밥그릇 바닥을 푹푹 파고 있으면
두레상 쪽 엉덩이를 들며 큰 언니 이름을 불렀다
"아나! 이것 까서 사이좋게 갈라먹고
껍데기는 멀리 갖다버려라! 아이들 발 찔릴라!"
마룻장 울리며 굴러오는 알방귀 소리에 하하 깔깔 웃다보면
갓 삶은 계란 서너 개는 까먹은 듯 목구멍이 보드레졌다
두레상 둘레에서 방귀 까먹듯 아버지를 까먹고 살다
데쳐놓은 소풀 지경에 이르러서야
너무 멀리 갖다 버린 껍질 생각을 한다
―2006년 계간 《시작》 봄호

1942년 경남 통영 출생
1967년 부산대 졸업
198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2003년 제4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시집으로 『 괄호 속의 귀뚜라미』『구절리 바람소리 』
『내 눈앞의 전선 』『山詩集 』『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편저『윤극영전집 1,2권 』산악관련 저서로 『금강산은 부른다 』
산행에세이『산아, 산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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