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 심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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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493회 작성일 19-06-10 11:18본문
색
심강우
사태가 났다
무너져 내린 단풍의 잔해로
욱수골 저수지 가는 길이 막혔다
붉은색이 엷어져 가는 세월이었다
당신과 나눈 말들이 몇 번 피고 졌는지
옹이로 갈라진 내 몸피를 보면 알 수 있을는지,
물의 냄새에는 여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장고의 시간은 묵은 화약처럼 푸슬푸슬 흘러내린다
저수지 가는 길, 검붉게 찍힌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계절이 만나는 둑길, 겹쳐진 색 한가운데 서서
나는 방금 바람이 복원한 파랑을 내려다본다
경사진 마음에 희미한 목소리들이 찰랑거린다
내 몸의 낡은 색들이 물에 풀려간다
시간은 색이다, 아주 오래전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내 몸이 그린 곳곳에 당신의 바탕색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묻어나면서 나는 이제
채도와 명도가 너무 낮은 색,
어느덧 저수지에 또 다른 색이 어린다
무너져 내린 단풍이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거기 초록의 웃음 하나가 하얀 미소에 스며드는 걸
본다, 내가 물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 색, 당신
―심강우 시집 『색』 (현대시학, 2017)에서
2013년 수주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201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 당선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동시집 『쉿!』 시집 『색色』 등
댓글목록
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맛이깊으면멋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색을 매개로 하여 회상해 보는 시인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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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수골 저수지로 가던 가을 어느 날, 단풍의 잔해로 길이 막혔다.
저수지에 고인, 물들은 지나간 세월의 저장고, 그 속에서 당신이라는 기억을 꺼내 본다.
아마도, 이 시인의 그녀는 지금은 곁에 없나 보다.
어떤 사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구절로 이 시인의 사랑이 헌신적이었음을, 혹은 맹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처음 시를 읽고 났을 때는, 이 구절이 거슬렸다.
쓸데없는 단정적 설명으로 읽어 나가는 맛을 끊어버렸기에.
다시 읽으면 생각해 보니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사랑에 대한 비망록일 것이라는 데 이르러서야, 이 구절이 들어가야만 할 당위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만 아니라면 차라리 생략하는 게 독자들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아마 그럼에도 그녀는 시인처럼 자신의 색을 풀어내지는 않았나 보다.
저수지에 떠내려온 단풍을 보며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닮은 또 다른 누군가의 무너진 사랑, 혹은 지난날 자신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본다.
그리고 떠오르는 그녀의 웃음.
가장 사랑했던 시절이라서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라 쓴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