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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사물 연습 / 서안나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86회 작성일 19-06-14 09:50

본문

오후의 사물 연습

 

   서안나

  


나는 루저입니다

있지만 없습니다

나는 사물과 자주 부딪힙니다

나의 뒤편은 사물입니다

뒤로 걸으면 사물은 더 춥습니다

               *

개처럼 계속 짖기

돌멩이처럼 계속 멈춰있기

               *

나는 인형처럼 눈을 감으면 계속 인형입니다

               *

사람과 부딪혀 외부가 생깁니다

오후의 사물 연습은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은 여행입니다

               *

지구를 끌고 다닌 적이 있지요

설탕을 먹으면 보라색을 칠하고 싶었지요

걸을수록 가난해졌고

만날수록 멀어집니다

               *

나는 가끔 뭉클합니다

종이 코끼리처럼 버려지기도 합니다

반성문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

나는 나를 떠날 겁니다

감기약처럼 혼몽하게 도시를 떠돕니다

버려진 화단에

고요하게 사물처럼 앉아 있기도 합니다

               *

사물은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지 않습니다

신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미 신입니다

당신과 나의 침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사물은 쉽게 썩지 않으며

쉽게 죽지 않으며

쉽게 분노하지 않으며

아랫도리로 아이를 낳지 않으며

성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열면 열리고

닫으면 닫히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며

               *

나는 열리고 닫힙니다

나의 뒤편은 사물입니다

뒤로 걸으면 사물은 더 춥습니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2019년 봄호



1965년 제주 출생
1990년《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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