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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 구효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9회 작성일 19-09-16 09:41

본문

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구효경

다루기 힘든 약대처럼 발굽으로 밀어내고 싶은 책들을 밀어낸다.

고전의 역사서를 서가 뒤쪽에 처박으면 고전시대가 구석지로 밀려나는 것 같고

낭만파의 화집을 다락방에 감추면 낭만주의시대가 어둔 뒤안길로 암전해가는 것 같다.

책상과 손바닥에 놓인 종이의 혁명이 세계를 싣고나가는 트럭이 된다면

월세 방을 옮기며 이삿짐에 고물상으로 실어 보낸 책들로 인해

오늘날의 모든 시대는 종말을 맞을 것.

팔이 무한한 안으로 굽는 시대.

혼자 비좁은 바깥으로 뻗어가는 괴물의 팔 같은 방 한 칸에서

요절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진부한 노래를 불렀다, 불렀다, 불렀다.

덧없는 노력을 쏟았다.

지난 달 제출한 이력서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고,

팔목엔 푸른 피와 냄새로 밴 수음의 흔적들이 선연하다.

염통을 과녁으로 들고선 저녁, 제 팔자에 적합한 비난의 화살이 穴을 관통했다

 

너와 내가 공유한 구멍 속으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고, 비로 습작의 음표들을 잇댄다.

 

시를 모르는 여인아, 나는 너의 심장보다 염통을 더 사랑한다.

이미 관통당한 피를 줄줄 흘려보내며

사라진 악사들을 몸 안에서 빼내오는 흑기사가 되려는지.

기사도의 정신은 죽었고, 너의 염통마저 결핵에 옮기 전 어서 내 몸에서 도망치길 바랄게.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교실, 하프시코드와 쳄발로가 죽은 묵상을 연주하는 복도,

요컨대 그 자리에서 너는 말 없는 얼치기 가수다

어눌한 언변 대신 폐활량 높은 단조의 음을 뱉어 대화를 걸어오지

너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었다고 했지만 과거형의 발언은 이미 네가 죽은 사람이며,

그 광경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치부의 고백 같았지

 

창문을 열며, 이런 날의 쇼팽 에튀드는 축축한 느낌이야, 이별의 곡도 추격도 꺼내지마.

버려진 피아노가 죽었을까……

벙어리 소프라노와 나이 어린 카운터테너는 반주 없이 대화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작 궁금한 건 푸른 노트를 버린 자리에 피어날 곰팡이의 안부였다.

사라져야할 것은 반주나 말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었는데, 왜 버벅거리고 있는 거지.

휴지통에 구겨 넣은 사직서처럼 몇 번씩 돌출했다가도 폐기되는 지겨운 그림자들,

발에서 떼어내어 서가 창고에 가둔다.

나 없이 그림자만 책들을 먹고 잠들며 책들을 찢으며 자라길. 피아노의 시인이여.

유일하게 남겨놓은 시대의 유언장처럼 마지막 역설을 토해낸다.

절대로 독서 따위는 하지 마.

길은 책 밖에 있어 비상구도 탈출구도 절대 책 안에 존재하진 않지.

늙은 영감처럼 쉰 소리를 거창하게 씹어대면서도 민망한 줄을 몰라

젊은 날 유기했던 콘스탄티아라가 뛰어나와 눅눅히 젖은 노트를 뒤적일 때

거미의 입에서 나온 실뿌리 같은 침을 뱉는다.

벙어리 가수 흉내에 익숙한 푸른색이 점철한다.

 

나이만큼 쌓인 악보들, 우울에 대한 짤막한 단상, 실어증과 폭언증 사이의 틈새,

문턱을 굴러다니는 활자들, 비로 쓸어내린다.


- 2014시인광장》 당선작





구효경 프로필 사진.jpg


1987년 전남 화순 출생

2014시인광장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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