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소폭포 가랑이에 머물다 / 정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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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87회 작성일 19-09-17 11:27본문
직소폭포 가랑이에 머물다
정동철
직소폭포 가랑이 사이에다 머리를 처박다
나는 애초 세상을 피해 이곳에 들어왔으나 벼랑 끝으로 가는 길도 길이었음을 내리 꽂히는 직소폭포의 오줌줄기를 보면 귀 기울이지 않고도 알 수 있어 내 마음은 너무 빨리 흰머리 갈대가 되었다
혼자서 불타다 혼자서 사라지는 단풍나무의 세상에서 떠돌다 지친 나를 씩씩하고 당당한 저 가랑이에다 부끄러운 머리부터 처박고 싶었던 것인데 벼락천불 같은 오줌 줄기가 세상의 쓸쓸한 일로 분함을 삭이지 못하는 내 머리통을 뚫고 지나가버리면 나 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좋을지 몰라 끝도 없는 직소폭포의 뱃속에다 손발과 몸통 얼굴도 집념과 질투까지도 밀가루 반죽처럼 뭉뚱그려 애초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인데
세상을 짊어지고 기우뚱 내소사를 넘어가는 노을이 무얼 알겠다는 것인지 빙그레 웃는 것이다 그래 단단한 슬픔을 깨뜨려 다시 슬픔을 꺼내듯 내 멍멍한 머리통을 깨 너를 비워내게 하는데 생생하고 지릿한 폭포의 오줌이 고인 저 샛노란 화엄의 호수 속에 들어가 한 두어 해 쯤 잠겨 있었던 것인데
그렇게 잠겼다가 헌옷을 갈아입듯 맑게 생(生)을 우려내고 나와 보니 가을 저녁이 알아서 그 여자 가랑이 사이로 곤두박질치고 수천수만의 꽃잎들 아직도 연못 위를 떠돌고 묵은 기억들이 폭포 줄기를 좇아 산 아래 마을의 불빛처럼 역류하고 있는지라 이제 쓸쓸해하는 것도 우습기만 하여 지는 꽃들 눈물 흘리는 네 눈 속에 넣어줄 수 있겠다
―정동철 시집 『나타났다』(모악, 2016)에서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졸업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집 『나타났다』 등
2014년 작가의 눈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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