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여인숙 / 손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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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626회 작성일 20-02-03 14:37본문
눈보라 여인숙
손순미
마당 입구 측백나무 남편처럼 버티고 섰어도
객지에 지쳐 기어드는 사내들에게
따뜻한 잠의 젖을 물리던 여자
늙어 더 이상 나올 젖이 없는데도 그 여자
아직도 브래지어 같은 문 열어놓고
석유난로에 겨우 몸을 녹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실망할 때쯤
눈보라가 도착했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울고 왔는지
눈물범벅이 된 눈보라가
사내처럼 여인숙의 허리를 꼬옥 껴안는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추억이 삽입된 눈보라 여인숙 불이 훅! 꺼진다
백발이 다 된 여자의 처마 끝에서
밤새도록 고드름 젖이 뚝뚝 흘러내린다
빨수록 배고픈 고드름 젖이 하염없이 녹아내린다
―손순미 시집 『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에서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칸나의 저녁』 등
제11회 부산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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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맛이깊으면멋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여인숙에서 묻어나는 애환
여인숙, 한자로는 旅人宿이니, 여행자를 위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요즘이야 호텔, 모텔, 장 등 다양한 숙박업소가 생겨나, 여인숙이라는 곳은 찾기 힘들어졌다.
한때, 여관과 여인숙이 숙박업을 양분하고 있었으며, 여인숙은 여관을 찾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으로, 여관에 비해서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게 女人宿이라 표기되면 묘한 상상을 자극하는 곳이 된다.
이런 잠자리의 격을 나타내는 노래가 군대 내에서는 있었다, 군필자라면 다들 아는.
이 시에서 여인숙은 旅人宿이자 女人宿이다.
사별한 남편을 대신하는 마당 입구의 측백나무를 세워 놓았으나, 브래지어 같은 여인숙 문을 열어 놓고 기어드는 숱한 지친 사내들을 따뜻하게 재워 준다.
한겨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매서운 밤, 뒤늦게 눈물 범벅이 된 눈보라가 몰려와 여인네의 허리춤을 껴안는다.
서로 각자 다른 사연이 있음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훅 하고 불을 끈다.
그렇게 여인숙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쥔장의 머리도 백발이 되었다.
아침이 밝자 고드름이 녹아내린다, 하염없이.
여인숙, 젖, 브래지어 같은 문, 눈보라, 고드름.
여인숙이 지닌 다소 에로틱한 상상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마냥 퇴폐적이지 만은 않은 애환의 정서가
가득하다.
하나 아쉽다면, '고드름 젖'에서 영 '젖'이 어색하다.
어색함을 느낄 정도임에도 젖을 강조한 시인의 의도는 분명 있겠지만, 속속들이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이런 어색함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2020.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