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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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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8회 작성일 20-03-25 14:12

본문

하느님은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

 

나희덕

 

 

'쓰다'라는 동사의 맛이 항상 쓴 것은 아닙니다

'보다'라는 동사는 때로 조사나 부사가 되기도 합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

'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

하느님이 부사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양치기가 사제보다 더 숭고할 수 있는 건

바로 부사 때문이에요

양치기가 어떻게 양들을 불러 모았는지

그때 눈빛은 어땠는지

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했는지

해질 무렵 어둠은 얼마나 천천히 다가왔는지

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돌아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가 얼마나 많이 피어 있었는지

부사로 이루어진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부사는 희미한 그림자 같아서

부사 곁에서는 마음도 발소리를 낮춘답니다

 

'천천히'라는 부사는 얼마나 천천히 어두워지는지요

'처음'이나 '그저'라는 부사 뒤에서 망설이는 동사들을 보세요

동사들이 침묵하는 건 부사들 때문이에요

그러니 어떤 부사를 발음하기 전에는 오래오래 생각하세요

 

그런데 하느님, 부사를 좋아하시는 당신은 정작

내 속에서 길을 잃으셨군요

 

 

*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권기돈 하주영 옮김, 새물결, 2015, 421


20070302134806197050752.jpg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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