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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속의 기린과 눈물이 마른 소녀들 / 조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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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25회 작성일 20-06-16 14:53

본문

터널 속의 기린과 눈물이 마른 소녀들

 

   조동범

 

 

어둡고 무서운 오늘밤을 생각한다

터널은 끝이고, 끝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불운은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미칠 것 같은 오늘밤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의 다리는 모두 끊어진 채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다

 

터널 속의 기린을 본 적이 있는가

머리가 천정까지 닿을 듯 느리게 걷는 기린의 오늘밤은 그러나

 

터널 밖의 세상을 모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기린은 천천히 어둠이 되어가며 큰 눈을 껌벅여 어둠을 거두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터널 속의 기린은 터널 속의 기린일 뿐이고

물러설 수 없는 벼랑은 터널의 출구에 비명처럼 버티고 서 있다

 

눈물이 마른 소녀들이 터널의 출구에서 벼랑과 기린과 오늘밤의 어둠을 통곡하지만,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오늘밤은

깊고 푸른 악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한다.

 

마른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지나가면

세상은 경악을 거듭하며 불온한 소문을 웅성일 뿐이다

터널 속의 기린은 여전히 터널 속에 있고, 소녀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 못하며,

 

세상의 끝으로부터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는 기린과

소녀들의 무서운 오늘밤은

추도할 수 없는 어젯밤이 되어

내일 밤의 마른번개를 향해 아득히 멀어져 갈 뿐이다.

 

어둡고 무서운 오늘밤을 생각한다

그것은 미칠 것 같은 오늘밤이고,

기린과 소녀는 세상의 끝을 향해 걸어 들어가며

모든 불행의 기원을 영원토록 복기하려 한다

 

 

 ⸻계간 시 전문지 애지2020년 여름호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
  시집『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카니발』,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비평집 『 4 년 11 개월 이틀 동안의 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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