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 이진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28회 작성일 21-06-21 22:19본문
'앉아서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이진명
처음 왔는데 이 모임에서는 인디언식 이름을 갖는대요
돌아가며 자기를 인디언식 이름으로소개해야 했어요
나는 인디언이다! 새 이름 짓기! 재미있고 진진했어요
황금노을 초록별하늘 새벽미소 한빛누리 하늘호수
어째 이름들이 한쪽으로 쏠렸지요?
하늘을 되게도 끌어들인 게 뭔지 신비한 냄새를 피우고 싶어하지요?
순서가 돌아오자 할 수없다 처음에 떠오른 그 이름으로 그냥
앉아서마늘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완전 부엌냄새 집구석냄새에 김빠지지 않을까 미안스러웠어요
하긴 속계산이 없었던 건 아니죠
암만 하늘할애비라도
마늘 짓쪄넣은 밥반찬에 밥 뜨는 일 그쳤다면
이 세상 사람 아니지 뭐 이 지구별에 권리 없지 뭐
근데 그들이 엄지를 세우고 와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완전 한국식이 세계적인 건 아니고 인디언적인 건 되나봐요
이즈음의 나는 부엌을 맴돌며 몹시 슬프게 지내는 참이었지요
뭐 이즈음뿐이던가요 오래된 일이죠
새 여자 인디언 앉아서마늘가였을까요
마룻바닥에 무거운 엉덩이 눌러붙인 어떤 실루엣이 허공에 둥 떠오릅니다
실루엣의 꼬부린 두 손쯤에서 배어나오는 마늘냄새가 허공을 채웁니다
냄새 매워오니 눈물이 돌고 죽 흐르고
인디언 멸망사를 기록한 책에 보면
예절 바르고 훌륭했다는 전사들
검은고라니 칼까마귀 붉은늑대 선곰 차는곰 앉은소 짤막소…
그리고 그들 중 누구의 아내였더라
그 아내의 이름 까치…
하늘을 뛰어다니다 숲속을 날아다니다
대지의 슬픈 운명 속으로 사라진 불타던 별들
총알이 날아오고 대포가 터져도
앉아서마늘까는 바구니 옆에 끼고
불타는 대지에 앉아 고요히 마늘 깝니다
눈을 맑히는 물 눈물이 두 줄
신성한 머리 조상의 먼 검은산으로부터 흘러옵니다
―이진명 시집 『세워진 사람』(창비, 2008)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 《작가세계》등단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