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기월식 / 이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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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월식
이명우
졸음은 눈치가 없다
그는 어제 야간근무를 해서 그런지
점심을 먹자마자 의자에 앉아 눈을 비빈다
눈썹 위로 처마가 아른거리는지
지붕이 걸려있는지
내려오는 무게에 윗눈썹은 아랫눈썹을 마주 잡는다
음식을 소화중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꾸벅거리던 고개가 모든 소리를 걸어 잠근다
달이 월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둥근 무게를 끌어안고 자전하는 의자
상사가 들어와도 꾸벅, 여직원들이 들어와도 꾸벅,
눈썹이 합장하는 동안,
깜깜함 속의 여유로움이 얼굴에 찾아오고
기어이 궤도를 이탈하여 달 속으로 들어간다
다 퇴근한 사무실에서
상사한테 반려되었던 ‘합계잔액시산표’를 다시 펼쳐놓는다
자재대금을 누락시켰다가 찾는데 걸린 날은 0일,
전산프로그램에 다시 입력시킨다
각 계정별로 분개를 하는데 걸린 날은 27일
대변과 차변의 금액이 똑같아지는 날도 27일
부분식에 가려졌다가 누명을 벗은 날은 3일
야간근무를 마치고 조는 사이 동료들이 출근하고 있다
지구에 세 들어 사는 한 직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 안에 갇힌 시간도 풀리지 않는다
―이명우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애지, 2017)

1959년 경북 영양 출생
제1회 암사동유적 세계유산 등재기원 문학작품 공모 대상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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