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봉수 서울 표류기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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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51회 작성일 21-08-01 14:18본문
허봉수 서울 표류기
신용목
그는 철제 뗏목을 타고 있다 먼 고향에서
발원한 한 가닥 지류를 타고
여덟 가닥의 해류가 흐르는 바다로 왔다
수십 개의 섬을 나루처럼 돌아
몇 번씩 선박을 갈아타고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한 척 뗏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해류는 때로
죽은 물고기떼처럼 부유했으며 어느 목에선
휘고 나뉘어 갈라졌다
그때마다 물결은 철제를 적셔 검은 해초를 키워냈지만
뗏목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소음에 익숙한 노숙자처럼 초연했다
날마다 그는 사방에 솟은 사각의 섬으로
사냥을 떠났다 바다에 와서
말하자면 그는 사냥꾼이 되었다
섬은 층층이 갈라진 틈을 커다랗게 열어
허공을 사각으로 묶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다에 와서
그가 배운 것은 암벽타기였다 매일 아침
한 짝씩 슬리퍼 장갑을 끼고
허공의 뼈를 유영하듯 타고 올라 쌍쌍의
검은 물고기떼를 노렸다 욕망을 거울처럼
완벽한 대칭으로 나눠가진 물고기들은
허기의 크기만큼 검은 해초의 유혹에 붙들려왔다
그러나 그가 암벽을 타는 것은
검은 물고기를 노획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검은 물고기들은 아득한
고향의 냄새를 가졌다 언제나 하나인
냄새의 가닥은 그가 열어둔 심연의 통로를 타고
몽롱하게 흘러들었으며 그때마다
그의 몸은 가닥을 셀 수 없는 바다가 되었다
물고기들의 허기는 해초를 감는
몇 번의 손놀림으로 다스려졌지만
검은 물고기는 그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얼마 후 사각 섬의 갈라진 틈
속으로 돌려보냈다 냄새를 먹고사는
그에게 검은 물고기떼는
말하자면 냄새를 사육해줄 유일한 어장이었다
다시 물고기들의 닳은 비늘 밖으로 너절한
냄새가 자라나올 때까지
사각 섬의 그늘을 갈아 끼우며
그는 철제 뗏목을 타고 있다 여덟 가닥 해류는
끝없이 내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고여 썩어가는 바다 어귀를 한 척
뗏목이 쉼없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검은 물고기들은
제 냄새가 피워올린 부피만큼의 크기를 한
물컹한 슬픔을 등 태우고 다녔으며
그의 뗏목에는 그 슬픔의 이름이 검게 쓰여 있다
구두수선 구두닦음
―신용목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비, 2007)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등
제19회 백석문학상, 제18회 현대시작품상, 제14회 노작문학상
제2회 시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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