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행진 / 김병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95회 작성일 21-11-09 22:40본문
숲으로 행진
김병호
저 고양이는 단 두 개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협할 때와 짐짓 무시할 때의 표정인데
길고 뻣뻣한 수염의 각도만으로
신박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담벼락을 등지고 울음 없이 버티는 저 자세는 어느새 폐허를 건너온 연대(連帶)이고
표정 하나 없이 살다, 다 잃고 돌아온 나의 오늘 밤은 표류에 가깝고
여리고 홀연한 대치, 시커먼 벚나무를 사이에 둔 눈빛만 환하다
오늘이, 꺾어 신은 운동화 뒤축 같은 부끄러움이라면
빙하에 묻힌 시신의 표정 같은 안부라면
내일은 저 벚나무 그루터기쯤이 되겠다
메마른 발자국 가득한 들판을 떠돌며
뿔도 없이 수염 하나로 어둠과 싸우는 저 투지를
죽은 자리만 떠돌아, 죽어서도 떼어낼 수 없는 저 울음을
나의 전생이라 하면 안될까
새들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담벼락을 가린 나무들 사이로
하품을 하며 돌아서는 고양이가 말한다
그럼, 같이 갈래?
죽음을 데려갔다가 놓쳐버린, 숲 속으로 행진
검고 축축한 발자국들이 얼어붙어 있다
―계간 《문예연구》 2021년 가을호
1971년 광주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 등
2013년 한국시인협회상 젊은 시인상
2013년 제8회 윤동주 문학대상 젊은 작가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