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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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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86회 작성일 21-11-14 21:04

본문

<제1회 구지가 문학상 수상작>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피우고 한 송이 애도를 놓고 왔네. 나는 나의 빈궁한 유배처, 나의 고적한 유적지, 불탄 폐사지, 내가 나를 답사하고 탐사 중이네. 휘돌며 흰 보선발을 들어 춤도 춰보네. 나는 파장한 거리의 불 꺼진 상점들. 나는 나의 목 쉰 장사치. 나는 나의 홍등가. 내가 나의 창부, 거간꾼이라네. 그렇다면 나여. 끝내 나의 무엇으로 나는 남으려는지? 나는 나의 번다한 그 모든 혼란과 혼돈. 일생 나를 따라다니며 명치끝을 건드리는 생각이라는 뿔로 한 줄 문장을 쓰는 나는 고작 나의 가냘픈 질서, 나는 오늘도 문득, 태어난 일의 기적을 사네. 나라는 가능성을 사네.


  둑길에는 어린 산사나무가 한 광주리 꽃을 피웠네. 산사나무라는 해당화라는 이름에 묶인, 나무라는 꽃이라는 색()의 배열을 지나네. 몇 걸음 가다보니 못다 핀 꽃망울이 달린 채 부러진 꽃가지가 던져져 있네. 나는 찢겨져나간 나를 지나치지 못하네. 꽃가지를 주워 둑길을 걷네. 지난해 봄빛이 되비치는 둑길, 나는 나의 전생과 후생을 주워 둑길을 흘러가네. 빛과 그늘이 출렁이는 유리, 혹은 유리의 안쪽을 물고기들의 유영처럼.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네. 하나의 어항을 쓰는 두 마리 물고기의 동거처럼.

 

   *2월달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 (오픈사전)



jojungin-200.jpg

 

1998년 《창작과 비평 》등단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에서 대상
시집『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장미의 내용』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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