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달밤의 허수아비 노래 / 김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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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88회 작성일 21-12-02 21:12본문
비 오는 달밤의 허수아비 노래
김신용
나는 술집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이 내리고
빛의 그 앙상한 해골 위에 부드러운 살이 덮이고, 세상이
제 얼굴을 되찾는 때를, 몽롱히 턱을 괴고
온몸 누덕누덕 하꼬방을 짓는 취기에 실려, 마치 경전을 읽듯
술을 마시며, 내 몸에서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소금꽃잎을 바라보곤 했다.
내 삶의 터,
콘크리트, 그 거부의 몸짓만 우거진 공사장을 떠나
지친 영혼을 쉬게 하는 인도의 베레나스인 양, 이 저녁 시간
비틀거리며 찾아든 내 귀소歸巢의 술집,
마치 다비를 하듯 독을 마시며, 세상에---- 내 추락에 대한
증오의, 시퍼런 눈빛을 꽂아넣을 가슴이
없는 자의 그 황당한 몸부림에 홀로 저물어지곤 했다.
눈의
흰자위가 노오랗게 변하고, 뱃속에는 복수가 꿀렁이고
얼굴에는 저승꽃 같은 기미가 꺼멓게 타고
부종으로 온몸 퉁퉁 부어올라도, 지금은 종말처럼
포근히 어둠이 내리고, 술잔이 비워질 때
그리고 취기의 망치가 의식의 관절 마디마디를 내리칠 때
친구가 없어도 좋았다.
지게꾼 십 년 세월이면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에도
기대를 걸지 않게 되지 ----, 홀로 턱을 괴고
철거촌처럼 무너지고 있노라면 보였다. 못났으므로
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 같은 것 ---- 무적霧笛의 신음으로 짓씹으며
나는 정말 술집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삽도 질통도 내 생애 밖으로 내팽개치고 싶은 날.
―김신용 시집 『몽유 속을 걷다』 (실천문학, 1998)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바자울에 기대다』 『잉어』 등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1,2』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 등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시인광장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제1회 한유성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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