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8 / 이성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유령 8
이성렬
뚝섬 못미처 시작된 승객들의 말싸움은 지친 듯 금세 사그라졌다. 열차의 규칙적인 마디음에 섞여 신음하듯, 왕십리를 지났을 때 기차 바퀴가 발을 끄는 소리가 아닌 –이를 가는 듯한 삐익삐익 또는 낑낑 소리와 같은 음향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인가… 신당역에 내려 반대 방향의 열차로 갈아탔을 때, 소리는 두 역 사이 1/3과 2/3 지점, 기억 속의 광무극장과 중국집 육합춘의 옛 자리에 일치하였다. 겨울날 무쇠 난로에 손을 데우며 보던 영화 <지옥문>과 모친의 곗날 회식의 추억이 서린 곳. 왜 이제 누구를 부르는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물었지만, 그 낡은 숨결들은 어느 날 가게를 접은 후에 시장 밖으로 걸어 나간 표구점 주인의 의족처럼 간 곳 없었다. 조악한 극장 간판의 울긋불긋한 색상을 다시 모을 수 있다면. 육합춘 잡탕밥의 고소한 냄새를 실어온 공기 입자들의 떨림을 재현한다면. 어떤 결심 때문에 세상 밖으로 사라져갔는지. 숨을 접은 두 유령의 사연을 알아볼 수 있을까. 지금의 이 난전은 그때의 연옥이 맞는가? 이들이 소멸하기로 작정한 순간, 우리는 혹시 다른 세상으로 갈라져 나온 것 아닌가? 골목을 건너는 고양이가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광무주차장에 쭈그려 앉아 오래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가로수 잎사귀에 새겨진 늙은 패잔병들의 유서가 몸을 뒤틀었다. 길 건너 빌딩 우듬지의 전광판에서, 최초의 인류 루시가 거닐던 대륙의 병든 아이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 속삭였다. 우리는 용도가 소진되면 껍데기만 남게 되는. 모든 기억을 소거한 후 세상 밖으로 스러질. 언제라도 시장으로부터 내쳐질 시간의 잔상이 아닌가? 그나마 남은 생을 탕진하며– 아무도 읽지 않는, 어떤 무대에도 오르지 못할 검은 대본을 그림자 속에 펼치는 희곡 작가의 기침 소리처럼. 빈터에 울려 퍼지는.
―계간 《시와경계》 2017년 가을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밀회』 등
산문집 『겹눈』
제1회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