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벗어놓은 웅덩이 하나 / 유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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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벗어놓은 웅덩이 하나
유미애
가죽을 벗어놓기 위해 세상 끝에 닿은 짐승처럼, 쓸쓸할 때가 있지
많이도 떠돌았네
달고 쓴, 눈먼 것들의 심장을 맛봤으니 꽃이 필 때마다 숨이 가빴지
뿌리를 갖고 싶었지 내가 피운 것이 꽃인지 눈물인지가 중요할까?
슬그머니 잡풀 사이로 숨어들었지만 절룩이는 온갖 종들이 모여들어서
망초 그늘에 세든 구덩이도 수시로 옮겨가야 했지
색색의 천을 기도처럼 묶고 떠나가는 배들
난들 배꽃 피는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연두의 봄날을 가르며 오는 목선 한 척의 설렘을 잊었을까
삽 한 자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나는
떠나는 발 풍문을 쫓는 귀 시간을 발라먹는 혓바닥이었을 뿐
웅덩이며 나뭇가지에 영혼을 흘리며 가는 노을에도 서러워져서
붉은 오지를 밝혀놓은 망초 꽃대가 신성한 촛불처럼 느껴졌지
그 흔들림과 나란히 허리를 숙이면 최초의 사람이라도 된 듯해
내가 달린 외로움의 씨앗 하나가 또 다른 나로부터 달아나던 중이었을까
이제 와 신전 하나를 몸에 들인들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냐만
삽날의 두려움이 쪼그라든 심장을 두드리지만, 지금도 나는
꽃핀 웅덩이를 노 저어가는 꿈을 꾼다네
―계간 《문파》 (2021, 겨울호)
1961년 경북 출생
2004년 《시인세계》등단
2009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음
시집『손톱』 『분홍 당나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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