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몽 / 이경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기몽記夢
이경교
출구가 열리자 왈칵, 빛이 밀려든다 캄캄한 실내로 신작로가 뚫린다 빛의 입자들이 꽃가루처럼 부유한다 별빛 부스러기 한 잎을 줍는다 빛의 통로를 따라 해안선이 그어진다 물결 멈춘 지점에 물의 도시가 세워진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다, 저 찰나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도시의 지붕마다 물결 모양이 찍힌다 격차 창틀에 햇살이 갇혀 격자로 쪼개진다 눈 없는 새들이 날아와 모서리를 부리로 찍는다
모든 건 환상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이다
꽃살무늬 창마다 꽃봉투가 꽂혀 있다 저 봉인된 봉투의 안쪽은 아직도 캄캄한 밤이다 출구가 열리자 왈칵, 꽃씨들이 쏟아진다 모든 게 어둠 안쪽에서 발아하여 여문 씨앗들이다
빛의 궤적을 따라 다시 해안선을 긋자
멈추었던 물결이 출렁인다
도시 하나가 세워지거나 지워지는 것도 한 순간이다
―<내외일보>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2022.01.21.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월간문학》 등단
동국대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꽃이 피는 이유』『달의 뼈』『모래의 시』등
시 해설서 『한국 현대시 이해와 감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