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꼬리와 소년 / 이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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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꼬리와 소년
이초우
우리 집 앞산은 하얀 말꼬리를 가진 산
비 오지 않은 날엔 그 긴 꼬리 엉덩이 사이에 감추고
비가 왔다 하면 엄청 높은 꽁무니에서 도랑 바닥까지
질질 끌며 휘둘러댔어
드러난 바닥 꼬리가 때릴 땐 그 소리 기수의
회초리 소리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어
비 오는 여름날
한참 동안 힐끔거리다 보면, 바닥 치는 꼬리 소리를 듣고
천녀들이 내려와 휘휘 그 말꼬리와 함께
요염하게 춤을 추다 공중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 어른거려
자꾸만 내 눈을 비벼보기도 했지
내 유년기의 발가벗은 목욕, 봇물에서 떨어지는
몽당 말꼬리에 여름을 식히곤 했지
봇물에서 새어 나온 그 짧은 꼬리 천녀가 거기까지 와
어린 소년을 유혹이라도 했는지 간지럽다 못해
어찌할 수 없는 달아오름을 느끼곤 했어
머리 길게 땋은 여자아이들, 등 뒤 머리카락 꼬리를 보면
비가 오다 햇살 퍼질 때
눈부시도록 춤을 춘 흰 눈 같은 천녀들을 보았고,
밤이 되면 그 사춘기 아이 꽤 긴 말꼬리 따라 뛰어내려
‘이젠 내 몸 박살 나 죽는구나’ 하다
온몸 무게 바닥에 닿기 직전
화들짝 깨어나 버리는 꿈 자주 꾸곤 했지
―계간 《시산맥》 2021년 겨울호
경남 합천 출생
부경대 해양생산시스템공학과 졸업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1818년 9월의 헤겔 선생』『웜홀 여행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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