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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에 봄을 인쇄한 적 있다 / 박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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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97회 작성일 22-04-17 21:23

본문

영혼에 봄을 인쇄한 적 있다

 

  박지웅

 


  가지는 저마다 봄비 한 방울 챙겼다

  봉긋이 달려 있는 젖들에 일찌감치 수유가 돌았을 터, 겨울에 고아가 된 고양이가 서너 번 울며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고 그 빗방울 속에 봄의 인쇄소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공들은 겨우내 마른 들판의 가슴을 열고 봄물이 비칠 때까지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부드럽게

  뿌리글자들이 바닥 깊은 데서 눈 뜰 때 되었는데 봄꽃들을 조판할 식자공들은 출근이 늦었다 빗방울 속의 무늬부터 인쇄해도 좋아요 물감을 더 준비해요 해마다 쓰던 색감으로 맞춰주세요

 

  어떤 빗방울 속에는 새 한 마리 흔들리고 있었다

  물의 바닥에서 천장가지 휘어지며 피어 있는 꽃봉오리들 사이로 서툴게 부리를 내밀던 어린 새는 그만 태어나지 못했다 새를 품고 알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가끔 제본할 수 없는 슬픔들이 낱장으로 흩어진다

  기장은 자꾸 뒷장이 떨어져나가는 내 낡은 영혼의 재질에 대해 물었다

  나는 말없이 새끼 고양이가 공장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물방울에서 몸을 뺄 때 허리가 조금 길어져있었다

 

  때로는 외면으로 읽을 때 아름다운 원고가 있다

  출력할 수 없는 페이지를 봄이라고 읽어도 좋은 것이다

 

  눈망울에 딱 한 번, 나는

  그 영혼에 봄을 인쇄한 적 있다

 

박지웅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문예중앙, 2016)



 

1969년 부산 출생
2004년  《시와 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2017년 '천상병 시(詩)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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