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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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김 산
케일과 상추 사이, 당귀와 딸기 사이,
도톰한 흙무덤을 만지면 스펀지처럼 폭신하다
무릎을 구부린 동그란 공벌레가 잎사귀 사이,
그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오후 햇살 위로 벌레들이 지나간 그 사이,
바람이 궁리를 하다 이파리에 작은 구멍을 낸다
식물을 보고 있으면 꿈틀거리는 게 보여서 질끈 눈을 감다가
다시 눈을 뜨면 그 사이, 한 뼘씩 내가 자란다
조금 늦게 자라도 돼,
햇볕도 바람도 잠시만 저 사이에 머물러다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그 사이,
나는 지금이 너무 좋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제는 여든다섯 아버지의 굽은 목과 낡은 메리야스
그 사이에 떨어진 말 못할 시간을 몰래 주워왔다
이 세상의 사이들이 시절만큼 적당히 멀어져서
식물 뒤편의 잎사귀들을 음각으로 주름지게 한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여름호

1976년 충남 논산 출생
2007년《시인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키키』『치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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