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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 / 신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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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02회 작성일 22-10-25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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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


  신정민



그의 턱 밑에 3센티미터 흉터가 있다

행운목 화분 모서리가 만들어 준 그것은 항상 닫혀있다


넘어진 적 있다, 는 상징에서

그는 모든 것을 꺼낸다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할 서류뭉치

주말에 다녀오기로 한 아이와의 동물원 약속

기린과 코끼리도 그곳에서 나온다

미처 다 꺼내지 못한 아내의 생일선물도

어지러운 책상의 물건들도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해진 그의 방은

그가 지저분한 모든 것들을 그곳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옆자리 동료가 자신을 헐뜯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그가 꾹, 참을 수 있었던 것

불같은 마음을 집어넣고 스윽,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밑 짧은 바지였다가

짤랑거리는 동전 지갑이었다가

모처럼 장만한 가죽재킷이 되기도 하는 그를 통해

흉이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흉없는 사람은 좀 수상했다


나는 도대체 그대의 몇 번째 고르바쵸프일까


검은 눈에 푸른 슈트를 입은

노오란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고르바쵸프

코가 큰 첫 번째 그대를 열면

이마가 넓고 입술이 도톰한 그대가 나오지

좀처럼 웃질 않아

웃음치료사가 필요하지

머리숱 없는 대머리 고르바쵸프

헛기침이 멈추지 않는 두 번째 그대는

심호흡 처방전이 필요해

세 번째 고르바쵸프 안에 숨어있는 바보

덧셈이 되질 않아

나팔꽃 더하기 꿀벌은 물고기가 되곤하지

고민 중인 찰리브라운의 눈을 가진

네 번째 그대를 품고

점점 작아지는 고르바쵸프

자신을 괴롭히고 괴롭혀서 시를 쓰지

부족하면 타인을 괴롭혀서라도

볼이 쳐진 다섯 번째 고르바쵸프

오렌지색 슈트에 녹색 나비텍타이의 유혹

유혹은 거절하기 위해 있는 것

입을 삐죽거릴 때마다 안경이 흘러내리는 그대

붉은 여우꼬리로

이마를 감춘 그대를 품고 있지

숱 많은 콧수염 속에 입술을 감춘 그대

뚱뚱한 고르바쵸프 속에 다섯 개의 내가 있지

 

계간 힐링문화20229





전북 전주 출생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집『꽃들이 딸꾹』『뱀이 된 피아노』 』『나이지리아의 모자』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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