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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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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55회 작성일 22-11-29 20:31

본문

주 잠깐 빛나는 폐허

 

    심보선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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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 『오늘은 잘 모르겠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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