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수집 / 윤예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27회 작성일 22-12-05 17:14본문
수치의 수집
윤예영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나요?
그는 내가 그의 기억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지 물었다.
걱정마세요, 저는 편광체로 된 손을 갖고 있어요.
아니 감광성이던가.
조롱
마분지
종이봉투 안에서 짓물러가는 사과
책을 두 손으로 받들고 가는 소녀
조롱
지지부진
혼돈
외국인
장화
어떤 근사한 일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두 손을 깍지꼈다.
아. 네.
아. 네?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는 펜을 들어 동판을 긁어보였다.
이렇게.
아하. 네에.
그럼 명랑에서부터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그는 내 손에서 펜을 채어갔다.
명랑이라구요? 앨리스겠죠.
쿠퍼? 바우만?
어느 앨리스 말인가요.
부끄러움.
그는 펜촉으로 동판에 A를 새겼다.
바로 이 앨리스 말이에요.
나는 동판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깊이 낙담.
그는 나의 낙담을 보고 물구나무.
어쩌면 명랑이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재갈을 보다 선호하긴 합니다만.
때로는 쾌감.
아. 네.
나는 다시 용기를 내보았다.
동굴이 있다면 그건 오른쪽 허파와 왼쪽 허파 사이겠지요.
그건 사과였나요?
어쩌면.
대추야자열매일 리는 없으니까.
많이 짓물렀던가요?
글쎄요,
그렇게 많이는 아닌 것 같군요.
그쪽보다는.
아. 네.
아직 끝난 것 같지는 않지만 저는 먼저 가봐야겠군요.
아직 몇 건의 계약이 남아있어서.
저 확신에 찬 발걸음.
나는 부채처럼 손을 활짝 펴서 어제 손질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부끄러워져 두 손을 말아쥐었다.
정말이지 몸에 달린 가지를 제멋대로 흔들어대는 것들은
아. 네.
그의 손이 딛고 있던 곳은 너무 좁아서
미처 펼쳐보이지도 못한 문서들을 가까스로 펼쳐놓을 수 있었다.
어찌나 오래 굴려먹었는지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달큰하고 선뜩한.
한숨.
그러나 다시 명랑으로.
마침표.
―웹진 《시인광장》 2014년 3월호
1977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 『해바라기 연대기』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