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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잠 / 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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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90회 작성일 22-12-11 20:22

본문

수잠

 

  길상호

 


저수지 모퉁이를 돌아

낮에도 희뿌연 안개를 걷다 보면

작은 샛길이 나온다 했어요

 

길 끝에 딱 한 채,

물결 기와가 반짝이는 집

 

지도는 아무 소용 없으니

핸드폰 앱도 끄고 마음도 끄고

길 잃은 듯 오라 했어요

 

어린 내가 부르르, 등목을 하거나

늙은 내가 꾸벅꾸벅, 마루에서 졸거나

 

시간이 여러 겹으로 출렁여도

당황하지 말라 했어요

 

흰빛, 분홍빛, 붉은빛

담 밑의 봉숭아가 꽃즙을 짜내

모여든 귀신들 혈색을 되살려놓는 집

 

물 위에 얹어놓은 돌멩이가 가라앉기 전에

세계가 중력을 되찾기 전에

조금 서두르라 했어요

 

작은 바람 한 줄만 지나가도

집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했어요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202212월호 


 

kilsh.jpg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안에 잠들다』『모르는척』『눈의 심장을 받았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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