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 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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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10회 작성일 22-12-13 14:27본문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장이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12월 바람, 눈은 내리는데,
푹푹 쌓이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할아버지 혼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아버지, 수북한 털가죽에
손을 찔러 넣고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하는데,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날생선을 뜯으며.
세상은 머리까지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꼬대를 하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고양이, 강아지, 수한무,
개그맨, 회사원, 꽃집 아가씨, 약국 아저씨, 농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두꺼비, 탐정, 손자놈, 전경 아우들,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은 흥청흥청.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가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죽끼리 따뜻한데,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에도 눈은 시간처럼 쌓이는데,
작은 혁명의 밤이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데,
바람의 말을 자꾸 헛들어도 좋은,
너구리 말로도 그대로 좋은 너구리 저택의 밤.
하얀 눈 위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
그리고
천 년만큼 깊이 내려간 쓸쓸함, 눈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장이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2007)
1976년 전남 고흥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연꽃의 입술』『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환대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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