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 있었다 / 김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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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87회 작성일 22-12-21 13:41본문
그런 일이 있었다
김병호
두고 온 것이 많은 어제는 꽃나무의 어둡고 끈끈한 허기와 닮았습니다 고모는 봄을 다 산 꽃나무가 그을음 속에 시퍼렇게 숨는 것도 허기 탓이라 했습니다 새로 나고 드는지 이십삼 층 베란다엔 하루 내내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르렁 그르렁 아니 그랑 그랑, 녹슨 미닫이를 기어이 여닫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미움 없이 상처를 핥는 짐승의 신음 같기도 한데,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무섭다고 말하던 고모는 꼽추로 팔순을 넘겼습니다 고모를 볼 때마다 먼 곳을 오래오래 걸어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낳고 키운 것 하나 없다고 비밀도 함부로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물녘만 서성이던 고모를 보면 어쩌다가 서서 자는 사람처럼 깎아놓은 지 오래된 사과처럼, 어제가 멈춘 게 아니라 한꺼번에 지나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모의 젖은 흙발자국이 마르는 시간과 고모가 사다 준 딸기 맛 아이스바가 녹는 시간의 사이에는 또박또박 건너오지 못한 어제가 있었습니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쉰이 되어도 나는 다만 어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꺼워져 가는 어제의 바깥이 저물녘이 다 되어도 말입니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6월호
1971년 광주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 등
2013년 한국시인협회상 젊은 시인상
2013년 제8회 윤동주 문학대상 젊은 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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