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창문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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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71회 작성일 22-12-28 16:01본문
어제의 창문
김상미
나는 어제의 사람.
어제의 여자, 어제의 사랑.
모든 내일의 그림들을 끌어모아
어제의 벽에 붙이는 사람.
언제나 어제 속에만 기거하는 사람.
함께 노는 사람들도, 시도, 음악도, 놀이터도, 책도
모든 게 다 어제의 것들뿐.
아무리 오늘의 태양 아래 나를 발가벗겨 세워 놓아도
나를 비추는 건 오늘의 태양이 아니라 어제의 남은 빛들.
어제의 꿈, 어제의 이야기들.
나는 내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
오늘의 수돗물에 피 묻은 몸을 씻고
어제의 꿈들로 내 몸을 소독하는 사람.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내일의 훈훈한 설렘에도
오늘 불붙어 타오르는 열정에도
누군가의 뜨겁고 지독한 훈수에도 상관없이
묵묵히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서 어제로 가는 사람.
가고 또 가도 그 길이 그 길이고
세상 최악의 불청객인 내일의 빛들이
불타는 내 희망 속에 숨죽인 꿈들을 산산조각 내어도
나는 그냥 어제처럼 왈츠나 추며
쓰러진 자들은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목마른 자들에겐 내 피를 마시게 해주고
벌벌 떠는 자들에겐 내 외투를 벗어주고
길 잃은 자들에겐 친절한 길을 가르쳐주며
계속되는 사분의삼 박자의 그 리듬 속에서
그 리듬이 열어 보이는 새봄과 푸른 꽃으로 뒤덮인 초원과
목숨이 아홉 개인 길고양이들이 몇백 년 된 탄식의 나무 위에서
어제의, 어제의, 어제의 숙녀들처럼 환히 웃는 걸 바라보는 사람.
한껏 몸을 부풀리며 스텝을 밟으면서.
내일의 피투성이 문명은 죽은 자들의 뼈 위에서 끊임없이 세워질 테고
오늘의 피투성이 사랑은 그것을 토해낸 자들의 입술 위에서 다시 태어날 테니
나는 그저 어제의 그 리듬대로 왈츠나 추며
검은 시간의 유리잔 안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모래시계나 바라보는 사람.
어차피 내일이란 뼛속까지 악해야만 살아남는 곳.
그들과 상관없이 나는 어제로 가는 사람.
언제나 가파른 어제의 층계를 오르내리며
이 세상 모든 지나간 꿈들을 모아 왈츠나 추는 사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대들이 가차 없이 닫아버린 어제의 창문.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 『잡히지 않는 나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등
2003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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