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 나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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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64회 작성일 23-01-27 11:51본문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나혜경
놀라지 말자 대지처럼 저수지처럼
네거리에서 이부자리를 펴는 젊은 걸인들처럼
꽃이 꽃을 바라보듯
네가 너를 바라보듯 그렇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퐁뒤나 하끌레트의 긴 저녁 식사와 강아지의 습관과 향수의 취향에 대하여
가던 길을 계속 가자
개선문에서 샹젤리제를 지나 콩코드 광장으로 튈리르 공원으로
뛰던 길을 계속 뛰자
비에게도 임무가 있다면
뜨겁다와 차다, 얇다와 두껍다를 섞는 일
빗방울로는 무엇이라도 끊지 말고 연결시키자
무수한 점으로 달아나려는 것들을 이어 붙여 말을 만들자
빗방울을 닦아내지 말자
달빛처럼 낙화처럼 달곰쌉쌀하게 지나가는 비 에스프레소와 바게트로
간단한 식사를 학습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흩어진 이름을 간절히 부르기도 하는 비
울거나 키스하거나 누워 비를 맞거나 포옹하거나
걸으며 음식을 먹거나 간섭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마술사처럼 나는 낭만을 귓바퀴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쏟아지지 않게 증발하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나혜경 시집,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도서출판 역락, 2020)
1992년 《문예한국》으로 등단
시집으로 『무궁화, 너는 좋겠다』 『담쟁이덩굴의 독법』 『미스김라일락』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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