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보여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 송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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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87회 작성일 23-04-11 20:49본문
그것은 보여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송승언
머지않아 나는 정원의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진 속 설산은 눈안개에 덮여 있다
프레임 위는 하얗고 프레임 아래는 검다
산봉우리, 아마도 프레임의 중심은 그 경계다
산은 사라지는 중인 걸까 드러나는 중인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이란 명확할 수 없는 것일까
머지않아 다시 높바람이 불어오고
수직으로 긴 유리창은 우는 소리와 함께 떨린다
창 바깥 먼 곳에 높은 산을 보며
아주 어릴 적 우연히 읽은 헤세의 시를 떠올렸다
그 시 속에서 풍경은 안개에 가려 뿌옇고
절반이 외로운 채 잘려 나가 있다
그 시는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명징했기에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흐려지지 않은 채
어쩌면 그때부터 내 중심에 자리 잡았던 비전은
망각 속으로 들어가기를 이해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흩어지거나
지워지고 뒤덮이는 몇 점의 발자국이 되는 일
그러한 고독 속에서도 우리의 사회를 잊지 않는 일
아직 오지 않은
눈은 머지않아 그치고
산봉우리는 빛으로 덮일 것이다
문을 열자 쏟아지고 있었다
무서운 눈이
반쯤 파묻힌 채로 나는 나아가고 있었다
높은 곳으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제대로 눈뜨지 못한 채
내가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기대
머지않아 그것은 보여야 할 것이었다
정수리가 새하얘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
나타나야 했던 것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드러나야 할 것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그저
모든 대상들을 소음 속으로 빨아들이고만 있었다
내 중심에 펼쳐진 비전 풍경 속에는
내가 없다는 단순한 진리
나는 이 방의 문을 열고 나간 뒤에도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알게 될 것이었다
머지않아 내 대가리는 깨진다, 넘어지며
눈 위를 물들이는 선명한 생각
을 뒤덮으며 다시 눈 쏟아지자
생각이라는 것도 중단되었다
―《문장웹진》 2023년 4월호
1986년 강원도 원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1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철과 오크』 『사랑과 교육』
산문집 『직업 전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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