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얼음공주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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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357회 작성일 16-02-16 10:45본문
석양의 얼음공주
김상미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 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 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 게 뜨거운 피 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 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 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 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 때에 도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 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 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 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 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 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조 해지지 담배 피는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 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 가시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 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 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프란츠 카프카의 글 중에서 변용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로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 2003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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