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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밟는 소리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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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03회 작성일 23-05-01 18:12

본문

밟는 소리

 

    나희덕 

 


그날 새벽 꿈에서 들었다

누군가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가 얼마간 곁에 머물렀다

 

먼 길 떠나기 전

그녀가 다녀간 것이었구나,

다음 날 아침 부음을 듣고서야 알았다

 

접시의 물이 증발하듯

가쁜 호흡을 내려놓는 순간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식은 심장 위에 흰 꽃을 올려놓았다

 

더이상 지상의 양식을 삼킬 수 없게 된

더이상 지상의 공기를 마실 수 없게 된

 

그녀는 죽은 뒤에도

내 속에서 한없이 죽어간다

 

흰 눈 위에서

텅 빈 눈동자 속에서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려 했던 것일까

 

어느 눈길에서 서성이고 있는지

내 오른쪽 귀를 떠난 눈 밟는 소리는 아직

왼쪽 귀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죽음을 고요한 묵음이라 말하는가

 

그녀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눈 밟는 소리 들린다

 

겨울새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 자리

 

그녀의 발이 시려워서 어쩌나

나는 발을 구르고

눈 밟는 소리 멀어져간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20235월호



20070302134806197050752.jpg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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