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 / 박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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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66회 작성일 23-07-02 20:55본문
염색
박미산
우린 검은 바닥에서 함께 뒹굴곤 했습니다
그가 방에서 걸어 나와
내 무릎 앞에 앉습니다
짧은 커트 머리, 그인 줄 알았는데
그가 아닌 내가 젖은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있습니다
뇌 회로가 끊어지고 엉킨 그는 본능만 남았습니다
당당하고 기품 있게 번역하던 그
회로가 희미하게 이어지면 면도날 같은 말로 나를 쓰윽 긋고
때론 해맑은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겨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던 그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던 그의 눈빛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그는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깨진 삶이 은빛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져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만 가발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의 방을 엽니다
훅 끼치며 살아나는 그의 냄새
죽어버린 나의 젊음이 빠르게 거울 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산화제와 염모제가 뒤섞여 변해버린 그와 나처럼,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7월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
2006년 《유심》 당선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남양주 조지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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