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지대 / 조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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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32회 작성일 23-12-26 20:55본문
청색지대
조정인
청색에 떨어뜨린 청색처럼 나는 흔적 없이 스미고 번졌다 그것은 몹시도 적막한 일 나…… 하고 부르면 방향을 알 수 없이 나, 나, 나…… 대답하는 메아리들에 에워싸이는 그것은 잠수부가 물의 깊이에 몰입해가는 것과 같은 일
나의 청색에는 겹겹 나, 나. 나 ‘나’들의 메아리가 있다 그들 중에는 채집으로 생계를 꾸리는 혈거인들도 있다 어느 날은 어깨에 구럭을 멘 나를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생각났다는 듯 칡넝쿨로 짠 거친 구럭에서 한 줌 검은 잎사귀를 꺼내 건넸는데 그것은 먹을수록 허기를 느끼게 하는 허공 같은 것이었다 여름밤이었고 그믐달 아래였다
그때 이름 모를 잎사귀를 주고받던 나의 이쪽 손과 저쪽 손이 짙푸르던 걸 나는 잊지 못한다 그믐달 아래, 마르고 기름한 내 손의 출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으므로 그때 나의 이쪽과 저쪽 사이, 검게 눈뜬 그 깊은 협곡을 무어라 기록할까
지난밤 꿈에 나는 잔설 쌓인 숲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나를 만났다 내 안에 바람 부는 숲이 있다
― 누구라도 저 문을 밀고 나타났다가 문을 닫고 사라져가. 숲속엔 그런 문이 셀 수 없이 많아. 바람 부는 날 숲은 문 여닫는 소리로 얼마나 소란한지 알아? 그때의 소란을 듣는 일이 얼마나 고적한 일인지?
꿈속을 배회하는 여럿의 나를 지나가는 나는: 옻칠한 나무 반상에 물을 떠 놓고 흰 양초를 켜고 치성을 드리는 아내인가 하면 그 상을 뒤엎는 남편이기도 했다 쏙독새만 한 무쇠 가윗날을 양손으로 벌려 머리채를 베는 미용사인 나와 검은 머리 다발을 잘리는 붉은 제의의 샤먼인 내가 있었다 하나의 꿈은 모든 꿈의 총체 나의 가능한 깊이와 너비 나의 알레프
목하, 나는 나를 경험 중이다: 내가 무엇에 얼마나 기쁜지 어떻게 슬픈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무엇에 안도하는지 아침이면 감정들의 이마를 짚고 체온을 재고 맥박을 센다 어떤 감정은 갓. 세수하고 나와 물기도 걷히지 않은 말간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 날, 나는 내가 사랑스럽다 나는 지독한 자기성애자 그러므로 죽을 것처럼 열망하던 당신 또한 내가 경험한 다른 나일 수밖에
그러나 그것은 끝내 고독한 일 당신…… 하고 부르면 당신, 당신, 당신…… 대답하는 메아리에 에워싸이는 일은 어디에도 없는, 당신이라는 울창한 저쪽에 에워싸이는 일은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10월호
1998년 《창작과 비평 》등단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에서 대상
시집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장미의 내용』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지리산문학상〉 〈문학동네동시문학대상〉 〈구지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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