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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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김상미
깊이 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품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채워 흘려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코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었던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나
그 모든 것을 후회해
깊이 깊이 후회해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2022)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 『잡히지 않는 나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등
2003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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