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있다 / 이정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3회 작성일 24-04-23 10:24본문
나는 있다
이정란
땅 어딜 밟아도 벨이 울렸어
어딜 파도 까만 씨앗이었어
새싹은 지축을 흔든 후 혼돈에 빠졌지
말발굽이 지나가고 떨어져 나간 목에
뒤엉킨 천둥 벼락의 뿌리가 돋아났어
새끼 고양이의 이빨 같은 백설이
무한으로 꽉 찬 세상의 난청을 녹여주었지
영원을 사는 신의 이야기가 까무룩 낮잠이란 걸 알게 된 건
미지의 불 한 덩이 덕분이었어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하늘은 마음을 펼칠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
미래의 옆구리에서 떨어진
내 몸은 신의 언어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닿고
비어 있음으로 시작되는 중심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
무심히 지나가기만 해도 튀는 시간에 휘청이며
―이정란 시집, 『나는 있다』 (여우난골, 2023)
1959년 서울출생
199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어둠, 흑맥주가 있는 카페』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
『이를테면 빗방울』 등
추천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