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북 마을, 그 먼 / 최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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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92회 작성일 24-04-26 15:23본문
산북 마을, 그 먼
최기순
키 큰 전나무 숲 군사기밀도로가 전부인 마을은
겨울이 깊을수록 흰 산이 우뚝 솟아올랐다
시렁 위 싹을 틔울 감자들 아직 눈이 깜깜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고모들 구부러진 못처럼
박혀
양말을 깁고 가마니를 짜고
무채와 말린 산나물을 섞어 밥을 짓는 어머니는
철산 겨울이 맞닥뜨린 범의 숨소리 같다고
마당의 빨래들 뻣뻣하게 언 채로 눈을 맞고
눈송이들이 창호지에 보푸라기처럼 달라붙는 밤
할아버지의 느릿한 옛이야기는
추녀 끝 고드름을 단단한 직선으로 내려 키운다
등불 건 툇마루까지 눈이 쌓이고
소맷부리 해진 옷을 머리맡에 두면
꿈의 장막이 열리면서
가오리연이 새하얀 꼬리를 흔들며 유영하고
눈의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은하수를 흩뿌리며 달아났다
참새 떼가 새파란 공중을 향해
언 나뭇가지를 차고 오르는 아침
눈부신 햇살에
시리고 맑은 향의 구슬들이 챙챙챙 쏟아져 내렸다
―최기순 시집, 『흰 말채나무의 시간』 (푸른사상, 2020)
경기도 이천 출생
2001년《실천문학》등단
시집으로『음표들의 집』 『흰 말채나무의 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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