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므린 것들 /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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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9회 작성일 24-05-02 09:49본문
오므린 것들
유홍준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이 있다
―유홍준 시집, 『북천까마귀』 (문학사상, 2013)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
2005년 제1회 젊은 시인상 수상
2009년 제1회 시작 문학상 수상
2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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