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癸)라는 물고기를 안다 / 이영식 > 오늘의 시

계(癸)라는 물고기를 안다

    이영식

골방 손때 묻은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습니다

아, 거기 어둠의 상자 속

죽은 듯 갇혀 있는 심해어 한 마리

고요함을 상징하는

癸라는 이름의 물고기입니다

오랫동안 격리된 채

침묵의 젖꼭지만 빨고 있던 그는

내가 손가락으로 등을 가만히 누르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

긴 꼬리 흔들어 화답합니다

생각해보니

세상 온갖 소음에 갇힌 나는

고요의 바다 저 물고기에게

눈짓 한번 제대로 건네지 않았군요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두었습니다

극도의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침묵도 삶의 방식인 양

그는 무엇 하나 도모한 적 없는데

외로움 이기려는 몸짓일까요

언제부턴가 제 몸으로 빛을 만들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癸라는, 아니

고요라는 이름도 좋겠네요

오갈 데 없는 어둠 속

내 무심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는

미동도 없이 입만 뻐끔거립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침묵도 하나의 언어이거늘

고요의 틀에 갇힌 저 외톨이를 보고

나는 아무것도 읽지 못합니다

목석처럼 서 있다가는

ㅡ계간 《시산맥》 2024년 여름호

경기도 이천 출생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공갈빵이 먹고 싶다』 『희망온도』 『휴』 『꽃의 정치』

시화집 『꽃을 줄까 시를 줄까』 등 

제17회 애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