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물 보관소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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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62회 작성일 24-07-25 12:53본문
분실물 보관소
신용목
이곳은 텅 비었어,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면
이게 적당해.
주무관이 건넨 명패에는 ‘진담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농담이죠? 나는 물었고
진담이야!
나는 주무관이 건넨 명패를 달지 않았다. 진담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덕분에 나는 승진했다.
농담의 방에서 근무한다. 새로 온 인턴이 더워요, 그래서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하루가
물속이었다.
가자 지구가 독점하는 실적을 어떻게 가져오지? 믿어 봅시다.
여의도를 용산을, 아니
믿지 맙시다.
웃으며, 오늘도 슬프군요! 업무상
그런 대화가……
상사는 설거지거리를 생산한다. 회의가 끝나면
내 손은 수세미가 된다. 타이핑을 하면 자음을 닮은 비눗방울과 모음을 닮은 비눗방울이
아니 세제 방울이
머리 위에서 서로를 찾아다닌다. 마침,
한 아이가 살해당했다는 농담이 ‘동반자살’ 제목의 배너 창에서 깜박인다.
찬물로 헹궈 엎어놓은 컵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똑, 똑…… 똑,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맺혀있는
마지막 한 방울처럼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나의 하루가,
달마다 바뀌는 대출금 상환 내역이
가족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승진 축하해, 물을 줄 때마다 푸르게 반짝이는 금전수가
진담인 것 같아서, 우리 회사 책상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어요. 틀면 졸음이 쏟아지는 수도꼭지가
두려워진다. 진담이 될까 봐.
잠이 들까 봐.
이 방을 비우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적당한 명패를 찾아 문 앞에 달아놓고
우크라이나에서 쏟아지는 농담과 징용에 관한 농담과 시리아에도 농담이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는 농담까지
차곡차곡 프랑스산 가방에 담아
휴가를 냈는데,
바다에 갔는데
물속에 있었는데 오래
물을 느꼈는데
내 몸은 온통 화상이었다 중세 광장에서 돌에 맞아 쓰러진 사람의 맨살처럼
벌게지는 줄도 모르고
짓무르는 줄도 모르고
물속에서도
타고 있는 태양을 보고 있었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리고
첨벙이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군중 속에서 먼바다를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내밀고
그 몸을 붙드는 손들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손만 뻗어 나온 것만 같은 손들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이건, 잠이 아니고 꿈이 아니고, 문득
농담을 건네고 싶었는데……
나는 한 번도 농담을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 진담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지.
이럴 수는 없어. 심심한 자에게도 농담이
있겠지. 상실된 자에게도 농담이
농담으로 된 고백이…… 먼바다는 잠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아침을 다 펼쳐놓는 것처럼 무심하게 반짝이고
나는 아이가 되어 나를 부르는 사람 목소리가
먼바다로 떠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안 되겠어, 정말 안 되겠어. 어차피 이건 다 농담일 뿐이잖아요! 외치려고 일어섰는데
아이가 물안경을 쓰고 물 밖의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빨래를 한다. 미사일이 동해에 떨어졌다는 농담을 들으며 탈수된 바지를 꺼내
탈탈 턴다. 바지를 해안으로 걸어놓고
출근을 한다.
바지가 사막이 되는 동안
나는 기안을 짜고 야근을 하고 밤늦도록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다음날,
다시 ‘분실물 보관소’ 명패가 달린 방으로 들어간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24년 여름호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등
제19회 백석문학상, 제18회 현대시작품상, 제14회 노작문학상
제2회 시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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