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판각 기행 / 문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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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264회 작성일 24-09-08 12:09본문
바다 판각 기행
문정영
그녀에게 새긴 시간은 평면이었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바다였다
깊어서 평면으로 눕고 평평하게 말하기를 바랐다
바다는 산소를 만드는 식물성 프랭크톤으로 산다고, 그녀는 붉은 입술로 아주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눈으로 읽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듯
바다의 눈꺼풀을 덮으면 수평선이 지워졌다
바다는 오래 살아 있는 것들을 밀물판화에 새겼다
그녀와 내가 함께한 어제는 짜디짠 판각이었다
누군가 들여다보아도 거둘 것이 없는
찍어도 찍혀 나올 것이 없는 탄소발자국같이
지금까지의 여행을 지워가고 있다
바다는 이제 먹을 갈 깊이가 없다
썰물이 밀려가야 할 이유를 새길 때까지 판각을 다듬는
눈꺼풀로 바다를 내렸다 올리는 우리는
이번 생의 초보자일 뿐이다
―문정영 시집, 『술의 둠스데이』 (시산맥, 2024)
전남 장흥 출생
1988년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 『잉크 』
『그만큼』 『꽃들의 이별법』 『술의 둠스데이』 등
계간 《시산맥 》 발행인
댓글목록
바람부는밤님의 댓글
바람부는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1년 발표한 때의 시어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 우리의 시간이 지워지고, 인생은 누구나 처음이라는 시상은 그렇게 설레이지 않아도
각자의 기억에 한켠에 닿는 보편적인 감상이라 누군가를 기억해보는 시간을 주어서 좋았습니다.
탄소 발자국 같이 전문적인 단어를 시인의 고유의 느낌으로 새롭게 정의해서 시어에 넣은 것은
시적으로 필연성이 있었고 기발하게 착 감기는 부분이라면 아주 좋은 킥이 되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덜커덩 거리는 느낌이었는데 후에 수정되어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시의 짜임에 필연적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들어 조금 감상하는데 힘든 마음이 들었다는 건 제가 아무래도 이과라서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