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 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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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김해자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김해자 시집, 『니들의 시간』 (창비, 2024)

1961년 전라남도 신안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해자네 점집』
민중 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1998년 전태일문학상 제10회 백석문학상 수상
제13회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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