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끝내 말해주지 않고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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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끝내 말해주지 않고
천수호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혼자 크게 웃는 소리에 깨는 꿈처럼
소리가 진짜인지 귀가 정말인지 알 수가 없지
전설 속 거인이 제 몸 다 불살라져도 심장만은 남기는 것처럼
그 심장이 호수 속에서 천 년을 팔딱거리는 것처럼
이 호수 변에 있는 세쿼이아는 천 년쯤 산 거 같아서
진짜 목소리도 내고 거짓 울음도 알아챈다고 해서
어떤 비겁한 연인은
사랑을 끌고 이 나무 아래에서 이별을 고해보기도 한다는 데
나무가 목소리를 내는 건
두 사람의 거짓 언약을 부추기는 것과 같아서
누군가 곁을 서성이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 않는 말과 들을 수 없는 말을 사이에 두고
공원을 걷는 사람들
나무의 목소리를 기다리다가
의심을 키우는 것이 이승의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나무는 열 사람이 죽어도 끄떡도 않고
비밀도 결의도 잃어버리고 멀리서 찾아온 사람도 모르는 척하고
모른 척하는 것도 알게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찾는 것이 제 목소리라는 것도 끝내 말해주지 않고
혼자 웃는 꿈 안에 그대로 서 있어서 영원히 깨지 못할 거 같기도 한데
사람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들으려고 나무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나무는 사람의 심장을 두근거리게도 하고
ㅡ웹진 《시산맥》(2025, 봄호)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등
제5회 매계 문학상 수상
댓글목록
대왕암님의 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시글 잘 읽어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