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여 가라 / 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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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여 가라
김 언
어제는 비가 왔다. 햇빛에 물이 마르고 있다. 몸도 말릴 수 있을 것 같은 햇빛이다.
그래 몸이 마르고 있다. 비도 마르고 있고 빛도 마르면서 당도하고 있다. 어제는 비가
왔다. 오늘은 햇빛에 물이 마르고 있다. 웅덩이는 안 보인다. 웅덩이에 비친 거리의
풍경도 안 보인다. 당연히 거리를 떠돌다 잠깐 멈춘 내 얼굴도 안 보일 것이다.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다. 거기서는 빛도 마르고 있다. 체구도 작은 사람이 왜 저렇게
말랐을까 싶게 걸어간다. 검은 상의에 검은 하의를 입고. 흰 상의에 흰 하의를 입었다고
달라졌을까. 저 거리의 기분. 거리를 걷는 기분. 눈앞의 기분. 눈 뒤의 기분.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는 기분이 달아나고 있다. 일어나고 있다. 기분은 일어나는 것이고 달아나는
것이고 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 이렇게도 오래 붙들려서 불쾌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다.
기분은 휩싸인다. 기분이 기분을 둘러싸고 있다.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이라고 하자 기분은
달라진다. 기분은 어찌할 수 없다. 기분은 어쩌자고 기분이 되었는가. 이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힘닿는 데까지 가자. 끝날 때까지 가자. 기분은 가야 한다. 기분은 끝나고
있다. 이미 시작도 안 했는데. 기분이 온다. 기분을 기다리고 있다. 기분이 간다. 기분을
보내고 있다. 기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다시 온다. 기분이여 가라. 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
기분을 기다리고 있다.
―김언 시집, 『백지에게』 (민음사, 2024)

1973년 부산 출생
부산대 산업공학과 졸업
1998년 《시와 사상》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거인』 『모두가 움직인다』 『백지에게』
2006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제9회 미당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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