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구니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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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바구니
나희덕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나희덕 시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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